기원전 6세기 권력의 암투 시기에 왕자 中耳를 19년간 모시고 있던 개자추는 먹을 것이 없었을 때
자신의 허벅지 살로 만든 요리를 사슴고기라 속이고 왕자에게 먹여 그를 살렸다.
왕자는 그 후 춘추전국시대의 5패 중의 하나인 晋나라 文公이 된다.
신하들이 자신의 전공 만을 내세워 녹을 탐하였으나 개자추는 이를 부끄러워 하였다.
문공이 실시한 논공행상에서도 개자추는 빠졌고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면산으로 들어 갔다.
문공은 개자추를 잊고 지내다 어느 날 어려운 시기에 먹었던 사슴고기가 먹고 싶어 사슴으로 요리를 하였으나 그런 맛이 나지 않았다.
그 후 문공은 개자추의 은혜를 생각하게 되는데...
문공은 은혜를 갚기 위해서 면산에 찾아 갔으나 그는 하산을 거부하고 산 위로 더 올라가 버렸다.
문공은 그를 하산하게 할 목적으로 산에 불을 지른다.
그러나 개자추는 어머니를 끌어 안고 불에 타 죽어 버린다.
문공은 잘못을 뉘우치고 해마다 이때 3일간 식은 음식만 먹었으며 백성들에게도 식은 음식만을 먹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寒食이 유래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에도 2600여년 전의 중국 풍속이 전래된 것이다.
면산 중턱에 개자추의 묘가 있으며 최근에 화려하게 세운 개자추 사당인 개공 사당이 있다.
개자추 묘지 올라가는 길은 협곡의 잔도를 따라 올라 갈 수 있으며 입구에 돈을 내고 탈 수 있는 엘리베이터도 있다.
개자추 사당 올라가는 잔도
왼편 굴 안에 개자추 사당이 지어져 있다.
개자추 소상
晋의 패업은 문공의 아버지 헌공때부터 시작되었다.
헌공에게는 8명의 공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 태자로 정해진 申生과 中耳, 夷吾(이오)가 현명하고 출중하였다.
헌공 12년(BC 665)에 나중에 얻은 여인 여희로부터 해제가 태어났다.
이때부터 헌공은 8명의 공자를 멀리하게 되고 여희는 자신의 아들인 해제가 대를 잇게 하려고 음모를 꾸몄다.
신생이 보낸 음식과 술에 여희가 독약을 타서 헌공 앞에 대령하였고, 내시에게 먹였더니 내시는 즉사하였다.
신생이 헌공을 죽이려 한다는 모함을 하여 신생은 자살을 하게 하고 중이와 이오는 다른 곳으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5년 후에 헌공이 죽자 이극이 반란을 일으켜 해제를 죽이고 다른 나라에 도망가 있는 중이를 왕으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중이는 극구 사양하였다.
이에 夷吾를 모시고 와 왕에 오르니 그가 晋의 혜공이다.
혜공은 비밀리에 형인 중이를 암살하려고 자객을 보낸다.
이를 알아차린 중이는 12년간 망명해 있던 땅을 떠나 濟나라로 갔다.
이때 그의 나이 55세였으며 제나라에서는 중이를 환대하였다.
제나라 환공도 일찍이 망명 생활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공녀를 중이의 아내로 삼게 하는 등 극진히 대접하였다.
공녀는 가신 조쇠와 상의하여 제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귀국할 방법을 생각해 냈다.
중이에게 술을 많이 먹여 술에 취해 잠들었을 때 수레에 싣고 길을 떠났다.
여러 제후국을 거쳐 진나라에 도착하니 秦나라의 목공은 그를 환대하였다.
목공은 중이에게 군사를 주어 晋나라로 복귀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9년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晋나라의 王으로 복귀하니 그의 나이 62세였고 晋의 文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