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양양을 지나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속초공항을 끼고 설악산 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진전사 폐사지 가는 길이 나온다. 6km 정도 더 위로 올라가면 진전사지가 나오는데 먼저 국보 122호인 삼층석탑이 눈에 들어온다. 탑 뒤로는 설악산 산자락이 탑을 감싸고 있고, 설악산 줄기가 끝나는 산골짝 사이로 동해 바다가 빠꼼히 보인다. 옛 금당자리는 아마도 탑 뒤쪽 산자락에 있었을 것이다. 삼존불을 모신 법당에서 보면 삼층석탑 너머로 동해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해를 매일 볼 수 있게 가람이 배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법당에서 동해를 바라보는 경치가 정말 아름다웠을 것이다.
진전사지 삼층석탑, 국보 122호
陳田寺는 당나라 달마대사에 의해 제창된 “禪宗”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설파한 도의선사가 신라의 수도 멀리 떨어진 이곳에 가람을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의선사는 당나라에 35년간이나 유학 가 있었던 고승이며 821년에 귀국하였다. 원효와 의상대사 등에 의해서 전국 사찰에 퍼져있던 화엄종이 주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귀족들의 불교였다. “王卽佛” 사상으로써 왕이 곧 부처이며 미륵불이었던 것이다. 일반 중생들과는 거리가 먼 사상이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서 禪宗은 “見性成佛”, “自心卽佛”이라 하여 일반인도 미륵이 될 수 있고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장흥 보림사, 곡성 태안사, 남원 실상사, 영월 법흥사, 문경 봉암사, 보령 성주사(폐사), 강릉 굴산사(폐사) 등이 통일신라시대의 九山禪門으로써 지방 호족들이 오지에 세운 가람들이다. 당시는 중앙집권체제가 온전하지 못하고 지방 호족들이 각 지방을 통솔하던 시기였다. 선종은 장흥의 보림사 주지였던 보조선사 때에 와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고 도의선사 시기는 박해를 많이 받았다. 이곳 진전사는 언제 폐사되었는지 어느 기록에도 없다. 임진왜란 때거나 조선시대 폐불 정책 때 폐사되었을지 모른다.
진전사 삼층석탑은 국보 122호로서 탑은 3층이며 상륜부는 노반과 연꽃 봉오리 형상의 돌이 남아 있고 나머지 부분은 소실되어 없다. 높이는 5m 이고 미세 입자의 화강암으로 완벽한 이등변 삼각형을 이루는 아름답고 아담한 크기의 삼층석탑이다.
탑신부의 옥개석과 면석은 각각 돌 하나를 다듬어 만들었고 옥개석 받침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인 다섯 단을 이루고 있으며, 낙수면의 경사는 기울기가 보기에 완만하여 그지없이 느긋하다. 끝부분은 살짝 올려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고, 낙수면과 옥개석 받침이 수평면에 대하여 대칭을 이루고 있다. 네 모서리에는 풍탁을 걸었던 작은 구멍이 두 곳에 나 있으며 풍탁은 없어졌다. 설악산 골짜기에서 부는 바람에 풍탁이 내는 아름다운 소리를 지금은 들을 수 없는 것이다. 풍탁은 대부분 청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비바람에 녹슬어 없어졌거나, 장난끼 많은 동네 꼬마들이 떼어내어 장난감으로 놀았을지도 모른다.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보통 크기의 석탑이기 때문에 풍탁도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법당의 처마 끝에 다는 풍경 크기 정도였을 것이다.
기단은 상하 2층 기단이며 튼튼한 지대석에 놓여 있어 안정감을 더해준다. 기단 면석에는 탱주와 우주가 있으며 탱주 양쪽에는 비천상이 양각되어 있다. 비천상은 많이 마모되어 그 아름다운 모양을 식별하기가 좀 어려웠다. 다른 비천상들에 비해서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로 조각된 것이 특이하였다. 여주 고달사지 부도의 상륜부에 새겨진 비천상은 옆으로 나는 모습인 데. 기단 갑석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아래에는 부연을, 위에는 2층의 받침을 이루고 있다. 상층기단 면석에는 탱주를 경계로 팔부중상이 양쪽에 양각되어 있다. 팔부중상은 사천왕의 제자들로서 신라 말기 탑에서 잘 구현되어 있다. 탑에 표현된 팔부중상의 부조는 곧 살아나서 튀어나올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감히 석가의 사리를 훔치려는 무리를 벌 줄 것 같은 모습이다.
초층 면석은 돌 하나로 되어 있으며 사면에는 연화좌에 결가부좌해 앉아 있는 여래상이 잘 묘사되어 있다. 들어가는 입구를 향해 있는(남쪽) 여래상의 얼굴은 누군가에 의해서 얼굴이 파손되었는지 아니면 자연적으로 결이 생겨 떨어져 나갔는지 파손되어 있다. 설악산을 바라보는 면의 여래상은 아주 잘 보존되어 관찰하기 좋았다. 얼굴은 매우 온화하고 지그시 눈을 아래로 내려 깐 모습이며 통통하다. 몸 뒤로는 두광과 신광을 두 줄기 양각으로 표현하였다. 네 면에 표현한 손의 모습은 다르게 표현하였다. 아래쪽에 표현한 팔부중상의 무서운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 두상 쪽은 좀 더 앞으로 튀어나오고 아래쪽은 얇게 양각하여 얼굴 부분을 돋보이게 한 조각 솜씨가 미적인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진전사지에서 계곡 위쪽으로 500미터는 걸어가서야 안내 표시가 소나무 아래 널찍한 나무판에 붙여 있다. 올라가는 도중에 간이로 지은 음식점이 몇 채 있고 작은 강아지 두 마리가 우리를 향해 뒤쫓아 오며 짖는다. 사람이 그리웠는지. 산 계곡에서 부는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부는지 몸을 가누며 걷기 힘들었다.
경사진 길을 올라가니 부도의 상륜부가 눈에 들어왔다. 보물 439호. 안내표지판에는 구산선문의 국내 창시자 도의선사의 부도일 것이라 추측하는 안내문이 있다. 이 부도가 우리나라 최초의 부도일 것으로 전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전의 화엄종이나 법상종 등에서는 부처의 사리만 모시는 탑만을 건립하였으나 禪宗에서는 “見性成佛” 원리에 의해서 도를 닦은 고승도 사리를 탑에 모실 수 있기 때문에 도의선사의 부도가 최초일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전의 화엄종 계열의 고승들 부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단부는 사각형으로 일반탑의 형식을 그대로 따랐다. 다른 부도탑들은 기단부도 8각형인데 비해서 이 부도탑은 사각형 기단부에 팔각형 탑신부로 구성된 특이한 형식이다. 탑의 형태가 4각형은 중생의 모난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기단 하대석은 4개의 돌로 구성되었고 받침이 2층으로 되어있으며 중대석은 하나의 탱주와 양쪽에 우주를 새겼다. 상대석은 두툼한 부연이 강렬하게 위를 받치고 있다. 부도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당의 형식으로 탑신부는 구성되어 있다. 중국에서 전하는 부도탑들도 8각형이 기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리탑은 연화좌대에 놓여 있다. 극락 환생한 고승이 연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리라. 전면에는 감실의 흔적을 음각으로 긴 직사각형 형태로 얇게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도 팔각형으로서 낙수면이 경사지게 마지막 부분은 약간 올라간 형태로써 고려 초기에 나타나는 화려한 귀꽃은 생략되어 있다. 비천상 등의 다른 조각은 생략한 비교적 간단한 형태의 부도탑이다. 아마도 초창기의 부도탑인지라 어떤 화려한 장식적인 조각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고달사지에 있는 국보 4호인 부도탑의 크기나 화려함에 어찌 초창기 부도탑으로써 견줄 수 있겠는가. 다른 부도탑에 비해서 비례감 등이 맞지 않아 어딘지 불안정해 보인다. 그래도 크게 손상되지 않고 1200년 동안 긴 세월동안 있다가 우리 앞에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진전사지 부도탑
[[부도는 五大를 형상화한 것이다. 우주의 다섯 가지 구성요소의 변천을 기하학적 상징형으로 표현한 것이다. 부도의 기단부는 地를 상징하고, 그 위에 올려진 몸돌은 水를, 몸돌을 덮은 지붕돌은 火를, 맨 위에 올려진 반월형의 앙화는 風을, 맨 꼭대기에 있는 연봉오리는 空을 의미한다. 만물은 태어나서 번영을 누리다 다시 근원으로 회귀한다. 인간의 육체도 우주의 근원적 요소들이 합성한 것으로서 때가 되면 우주로 환원한다. 인간의 삶과 죽음은 우주 원소의 이합 집산의 과정에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사람의 처신과 도리는 살았을 때나 죽었을 때나 우주의 섭리에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우주를 이루는 地水火風 네 요소는 그 자체는 不死이지만 합일과 분리에 따라서 生과 死로 나뉜다. 어떤 인연으로 결합되어 있는 인간의 육체가 다시 어떤 환경에 의해서 분해되어 地水火風의 네 요소로 우주에 환원되는 것이 죽음이라 하였다. 이것이 緣起論에 바탕을 둔 삶과 죽음인 것이다. 진전사지 부도탑은 초기형태로써 地水火風을 나타내는 네 가지 요소만 표현되어 있다.]]
-허균著, "사찰장식"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