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은 13년전에 서안교통대학을 방문할 적에 와 보고 이번이 두번째 방문이다.
그동안 시내는 많이 정리가 되어 거리는 깨끗해지고 높은 고층 건물들이 많이 들어 차 있었다.
시내의 고급 브랜드 숍들도 많이 보이고 사람들의 패션도 아주 훌륭해졌다.
거리의 보도 블럭은 화강암을 반듯하게 깔아 아주 보기가 좋다.
서울 도심의 보도 블럭보다 한결 고급스럽고 좋아 보인다.
더구나 예전에는 갈탄을 연료로 사용하여 갈탄 냄새가 가득찼었는데 요즘은 가스를 사용하여 냄새가 없어졌다.
碑林은 서안 城의 남쪽 문에 가까운 곳에 있다.
漢대에서 淸대까지 주변에 널려 있던 비석을 모아 둔 곳으로 3000여개가 있다.
원래 孔廟이던 곳을 북송시대인 1087년에 石碑를 이곳에 모아 문헌을 읽고 공부할 수 있게 한 곳이다.
이곳 비석에 사용하는 돌은 조각이 잘되는 돌이다.
이곳 주변의 지층은 진흙이 수십미터 쌓이고 열을 받아 굳은 돌로써 톱으로도 잘 썰어진다.
그래서 받듯하게 만든 후 조각한후 검은 먹을 입혀 검은 돌처럼 만들었다.
碑林의 碑자에 점이 하나 빠져 있다.
글자를 쓰던 장군이 전투를 치른 후에 점을 찍는다고 하였는데 전쟁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하여 점이 빠져 있는 것이다.
당의 6대 황제인 현종이 18번째 아들인 李瑁(이모)의 처인 양귀비를 얻고자 해서
생각 끝에 현종이 쓴 글인데, 송나라때 세긴 비라고 한다.
당시 56세인 현종과 22세인 양귀비의 로맨스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현종은 국사를 제치고 양귀비에 빠져 살게되고 안록산의 난이 발생하여 양귀비는 처형된다.
중국에 그리스도교(景敎)가 전래되었다는 비석
관운장이 조조에게 붙잡혀 있을 때 유비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
두 대나무 잎 사이에 글씨를 넣은 것으로 "不謝東君意 丹靑獨立名 ..."
즉, 유비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비석은 1716년 청나라때 새긴 것이다
예전에 이곳에서 탁본을 200위안에 팔았는데 당시에 깍아서 30위안에 샀었다.
요즘은 500위안을 받는다고 한다.
달마상
인도 사람이었던 달마는 바다를 통하여 광주에 도착하여 양자강을 따라 올라왔다.
위진남북조시절로서 梁무제(520년)때 달마는 양무제를 만나게된다.
禪宗을 창시하였으며 우리나라에도 그영향을 미쳤다.
공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