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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여행과 고적지

국보 4호가 있는 고달사지

by 해오라비 이랑 2010. 4. 11.

 

 

야생화 계곡을 갔다가 시간이 남아 여주의 高達寺址를 가 보았다.

가는 도중에 산수유 마을 표지가 있어 가 보았는데 사진을 담을 만한 풍경이 없었다.

고달사지는 발굴작업이 끝났는지 정리가 되어 탐방로가 만들어 있었다.

 

혜목산(慧目山) 아래의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년)에 건립되었고,

고려시대에는 국가가 관장하는 3대 선원 중의 하나였다.

폐사된 이유는 기록에 없지만 임진란때 한강을 타고 올라온 왜적에 의해서 불살라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적 382호이고

국보 4호 : 고달사지 부도탑

보물 6호 : 원종대사 혜진탑비의 귀부와 이수

보물 7호 : 원종대사 혜진탑

보물 8호 : 석불좌대

보물 282호 : 쌍사자석등 - 국립중앙박물관 중앙 회랑에 전시되어 있다. 

 

 

 

보물 8호인 석불좌대.

좌대의 규모로 보아 금당도 무척 컸을 것이다.

 

 

 

 

 

보물 6호인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와 이수만 남고 탑비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탑비의 기록에 의하면 원종대사는 869년에 13세의 나이로 출가하였다.

고려 광종 9년(958년) 90세로 입적하여 광종왕이 애도하여 원종대사 혜진이라 추서하고

입적 후 17년이 지나서 헤진탑을 세웠다고 한다.

 

  

 

  

 

 

국보 4호인 고달사지 부도탑

 

산수유가 핀 산길을 조금 걸어 올라가면 국보 4호인 고달사지 부도탑이 나온다.

20년전에 이곳에 왔을 적에 느낀 점이었지만 관리가 부실하다고 생각하였는데,

몇년 전에 어떤 도굴꾼이 탑을 무너뜨려 조금 더 훼손이 되었다.

국보 4호를 이렇게 방치해 놓다니.....

원종대사 혜진탑보다 조금 일찍 만들어졌을 것으로 여기지만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 어느 스님의 부도탑인지도 모른다.

부도탑과 탑비는 같이 건립되는데 탑비는 흔적도 없다.

파괴된 탑비가 어디쯤에 묻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래전에 보았지만 근처 민가에서 고달사지 석재를 같다가 개울의 다리로 쓰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부도의 하대석은 팔각의 각면에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고 그 위에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중대석은 거북과 용 그리고 구름이 양각되어 있어 웅장함을 준다.

고승의 사리를 모신 몸돌에는 隅柱(모서리 기둥)이 새겨지고 문비(門扉: 자물쇠 문양)와 사천왕상, 영창(映窓)이 양각되었다.

상륜부는 추녀 끝에 귀꽃(꽃무늬)를 새겨 올렸다.

부도탑의 기승전결을 제대로 따른 아름답고 웅장한 어느 고승의 사리탑이다.

眼象: 원형이나 장방형의 곡선을 새겨서 우묵하게 파낸 조각의 방법

 

 

 

 

옥개석 아래의 비천상이 좌우에 새겨져 있다.

탁본을 떠간 자국이 남아 있다.

왼쪽은 비파를 타는 비천상이고

 

 

 

오른쪽은 꽃(?)을 든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악기인 것 같기도 하다.

 

 

상륜부

깨진 석재 사이로 이물질이 고여 부식을 촉진하고 있다.

 

 

탑 앞 좌우에 있는 돌상

 

 

중대석의 조각

 

 

 

몸돌

 

 

보물 7호인 원종대사(869-958) 혜진탑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팔각원당형 부도탑으로 높이가 2.5m에 이른다.

중대석에는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린 거북과 네마리의 용과 구름 문양이 새겨져 있다.

팔각형의 몸돌에는 門扉와 사천왕상이 교대로 양각되었다.

옥개석(지붕돌)에는 귀꽃이 크게 조각되어 있고 꽃무늬가 조각된 복발(覆鉢), 寶蓋, 寶珠가 놓여 있다.

산 아래쪽 방향으로 탑이 약간 기울어져 있어 무너질 위험이 있다.

 

 

 

4각형 비단부는 모난 인간 세상을 나타내고

사리를 모시는 몸돌은 8각형으로 만들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모난 인성을 부드럽게 하라는 뜻이 담겼다. 

 

 

중대석

 

 

거북의 꼬리와 여의주

 

 

 

몸돌

 

상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