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인 蜀나라의 王 유비와 그의 군사 제갈공명을 모신 사당으로 정식 명칭은 "漢昭烈廟"이다.
청두시의 남서쪽에 있고 6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14세기에 유비와 제갈공명의 사당을 합쳤다.
武候는 제갈공명의 관직을 줄여 사용하는 말이며 유비를 모신 昭烈祠가 먼저 있고,
뒤편에 제갈공명을 모신 武候祠가 있다.
유비의 아들 유선이 왕이 되고 나서 제갈공명에게 王급에 해당하는 武候를 내렸다.
무후사 뒤편에는 유비의 묘로 알려진 蕙陵이 있다.
왼편에 명나라때 세워진 제갈공명의 업적을 기린 비석
오른편에는 唐나라때 세워진 제갈공명의 업적을 기린 비석
청나라 초기에 세워진 건물인데 멸망한 明나라의 明자를 쓸 수 없게하여 明자의 日을 目자로 쓴 것이다.
형주(지금의 우한)를 지키고 있던 관운장은 오나라 여몽장군의 계략에 말려 형주를 버리고 맹성까지 퇴각하지만
그의 아들 관평과 함께 목이 잘려 맹성에서 최후를 맞는다.
관운장의 목은 위나라 조조에게 보내어지고 오나라의 손권은 그 댓가로 형주를 차지한다.
관운장의 잘려진 머리를 본 그 해에 위나라의 조조도 66세 나이(219년)로 죽는다.
도원 결의에 따라 한날 같이 죽기로 맹세하였건만 관운장이 먼저 죽자
유비는 제갈공명의 만류를 뿌리치고 오나라을 응징하려 출진한다.
이때 장비는 술만 마시면 부하들을 두들겨 패 그의 부하에 의해 살해된다.
6개월간의 대치 끝에 유비는 백제성에서 최후를 맞는데 그의 나이 63세로 223년의 일이다.
유비의 아들 유선이 17세의 나이로 촉한의 왕(223-263)을 계승한다.
관운장, 장비, 유비를 잃고 제갈공명만 남게 되는데 그는 227년에 군을 이끌고 북쪽 위나라 토벌에 나선다.
출정에 앞서 촉한의 왕 유선에게 글을 올렸는데 이것이 유명한 "前出師表"이다.
간략하면 "선제 소열 황제께서 창업 도중에 돌아가시고 천하는 세 갈래로 갈라져 다투고 있는데 우리 益州는 가장 피폐하여 국가의 존망이 걸린 시기입니다.
어진 신하를 가까이 하시고 소인을 멀리하며 신상 필벌로 공평 무사한 정사를 널리 천하에 펴사옵기 바라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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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사표를 올린 후 제갈공명은 장안(서안)의 남서쪽 漢中에 군대를 파견하여 위나라를 압박하였다.
장군 마속은 산아래에 진지를 구축하라는 제갈공명의 지시를 무시하고 산 위에 진지를 구축하여 위나라에 패하게 된다.
군령을 어긴 마속은 본보기로 사형을 당한다.
漢中으로 돌아온 제갈공명은 다시 "후출사표"를 유선에게 올리고 출진하지만 위나라 사마의의 강한 군대와 대치한다,
전투 중 그는 병이 들어 54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제갈공명은 227년에서 234년까지 6회에 걸쳐 북벌을 감행하였다.
이때은 그의 총명함이 사라진 때였다.
그리고 촉한은 멸망하고 위진남북조시대를 맞이한다.
..
그리고 水나라가 중원을 통일하지만 38년 밖에 통치하지 못하고 唐나라로 이어진다.
아래는 송나라 장군인 岳飛가 제갈공명의 출사표를 쓴 비석의 일부이다.
소열사에 들어서면 좌우에 촉한의 장수들 조각상이 있다.
방통, 마초, 장비, 관우.....
유비 현덕
제갈 공명
관운장
납매가 피어 향기가 진하다.
중국 계수나무(상록수)
매해 10월 쯤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다.
계수나무 열매는 극락왕생의 열매로 당나라때 부터 죽은 자가 관 속에 가져가는 열매가 되었다.
동요 반달에 나오는 계수나무는 이 나무이다.
한국에 요즘 심어진 계수나무는 일본산 계수나무로 활엽수이다.
도원 결의를 한 장소를 뒷뜰에 마련해 놓았다.
이곳은 벌써 매화가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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