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성 탄생 100주년 특별전이 덕수궁 미술관에서 8월 26일까지 열리고 있다.
2000년엔가 중앙일보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모은 전시회가 있었고 이번이 두번째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1950년 625전쟁때 대구에서 경찰관과 시비가 붙어 경찰이 쏜 총에 작고하였다.
그의 초기 그림들은 앙리 마티스 등의 야수파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아래부터는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그림과 글임.)
해당화, 1944년 작
조선 선전에 출품한 작품이라는데,
기울어진 수평선과 낯설은 돛배가 눈에 뜨인다.
여름실내, 1934년 작
거의 야수파의 그림을 모방한 것 같다.
실내, 1935년 작
강변, 1940년대
아리랑고개, 1934년 작
자화상, 1940년대
우리 근대미술에서 이인성 화백의 삶과 작품세계를 재조명
o 근대미술사료 수집 공고를 통해 새로운 작품 및 자료 발굴
o 덕수궁미술관의 대대적인 복원공사 후 국민들에게 무료개방 및 향후 근대미술중심 미술관 지향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정형민)은 5월 26일(토)부터 8월 26(일)까지 덕수궁미술관에서『鄕 이인성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개최한다. 이인성(1912-50) 화백은 일제 강점기인 1930-40년대 풍요롭고 상징적인 색채와 뛰어난 감각으로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괄목할만한 예술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번 전시는 이인성 화백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근대미술에서 이인성화백의 삶과 작품세계를 조명하기 위한 전시이다.
본 전시는‘시대의 천재로 불리웠던 화가’,‘인간 이인성’에 보다 밀접하기 위한 전시이다. 그동안 막연하게 설명되어왔던 여러 영향 관계들을 사료를 통해 확인하고 재조명함으로써 그의 치열했던 삶의 여정을 살펴볼 수 있다. 이를 위해 미술관은 서울과 대구지역에 두 달 반 동안 사료수집공고를 내어 흩어져있는 사료들을 수집했으며 여러 차례 전문가들과 사료 평가회의를 거쳤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여섯 개의 소주제로 학술행사가 개최되어 이인성 연구의 현 지점을 확인하는 자리를 마련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전시가 준비되었다.
그가 작품을 통해 추구했던 것은 鄕, 즉 고향 향토에 관한 것이다.「향토를 찾아서」,「향토를 그리다」라는 그의 글에서 밝히고 있듯이,‘향토’는 고향 대구이자 조국 산천을 의미하는 지리적 고향이며, 또한 예술적 고향이기도 하다. 이인성은 서구의 것도 아니고 일본의 것도 아닌 우리미술을 추구하는 관점에서 향토색를 추구해왔고, 결국 우리 정서에 맞는 소재와 강렬한 색채, 상징성으로 1930년대 괄목할만한 작품을 형상화하였다. 이인성의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회화는 우리 화단에 녹아들어 면면히 흐르고 있다.
이번 전시는 근대기 치열한 삶을 살았던 한 인물을 가슴으로 만나는 특별한 시간이 될 것이다. 전시장의 아카이브공간에는 그의 사진과 그가 수집했던 도서와 엽서 등 다양한 실물자료가 공개된다. 작가의 숨결이 배어있는 사료를 통해 삶의 족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의 교유관계를 통한 이인성의 지향점과 서구·일본미술과의 영향관계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다시없는 기회가 될 것이다.
전시 개막행사로 1939년 발행된 악보‘물새발자욱’이 한국예술종합학교‘크누아 세레나데 4중창’에 의해 공연된다.‘물새발자욱’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사료 중의 하나로 윤복진 시인이 작사, 박태준이 작곡하였으며, 이인성 화백이 표지를 판화로 제작하였다. 절친한 사이였던 윤복진(1907-?)은 월북한 문학가로, 이인성 화백이 그림을 그리고 윤복진이 시를 쓴 경우는 악보 뿐만 아니라 신문 삽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사진첩에서 그들의 친밀한 교유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일본유학도 하고 나이도 5살 많았던 윤복진의 서정적인 문학관이 이인성화백의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여 이번 개막식에 의미있는 행사자리를 마련하였다.
어린이 및 청소년을 위한 전시연계교육도 준비된다. 감상과 창작을 동시에 체험하는 과정으로, 전문강사와 함께 덕수궁 내 풍경을 수채화로 그리는 활동이 포함되어 있다. 매주 토요일 총 5회에 걸친 현장교육은 주 5일제 수업을 맞은 청소년들이 교실 밖에서 만날 수 있는 생생한 미술체험의 장이다. 또한 전시기간 중 초등교사들에게는 청소년 전시감상교육법을 주제로 연계 강연회가 준비된다.
덕수궁미술관은 대대적인 시설 복원 공사를 마치고 이번 전시를 국민들에게 무료 개방한다. 《鄕 이인성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시작으로 3층에는《한국근대미술: 꿈과 시》전(50여명, 90여점)을 열어 한국 근대미술 걸작을 상시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으며 향후 덕수궁미술관은 근대미술 중심의 미술관을 지향할 것이다.
I. 대구화단과 이인성
이인성 작품세계의 방향은 대구화단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대구 화단은 수채화로 처음 서양화를 시작한 초창기 근대 화단이었다. 대구 최초의 한국인 미술 모임이었던 영과회(1927-29)와, 향토회(1930-35)에 이인성은 정기적으로 출품을 하게 된다. 영과회는 일본의 탄압에 의해 해체되고 영과회 중 순수계열의 화가들이 중심이 되어 향토회를 개최하게 된다. 이 시기 스승 서동진과 향토회 결성에 영향을 미쳤던 김용준의 예술관, 그리고 절친했던 윤복진의 서정적 문학관은 이인성 예술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인성은 서동진의 대구미술사에서 인쇄 및 도안을 하며 수채화를 배웠고 1929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채화를 출품하여 스승인 서동진과 나란히 입선하게 된다. 이렇게 대구화단을 통해 형성된 그의 예술관은 이후에도 지속된다.
II. 근대성의 인식
이인성은 1931년 말에서 1935년까지 일본에 체류하게 된다. 그는 도쿄와 대구를 오가며 일본 전람회와 조선미술전람회에 꾸준히 출품하면서 수채화와 유화로 기량을 쌓아간다. 당시 대구에서는 근대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계산동 성당 등 건물들이 세워졌는데 이러한 신식 건물, 세련된 실내, 정원 풍경은 이인성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이 작품들에서는 빛과 색, 짧고 단속적인 붓질, 화면을 과감히 자르는 기법 등이 나타난다. 서구 및 일본 회화와의 영향관계는 이인성이 수집했던 200장이 넘는 그림 엽서와 도서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일본화단의 영향으로 불투명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이인성은 순도높은 원색을 사용하고 빨강과 녹색을 배치하여 강한 효과를 내고 있다. 이후 이러한 색채는 상징적인 색채로 변모하게 된다.
III. 조선향토색의 구현
이인성은 조선향토색을 추구하였다. 조선 향토색은 1930년대를 전후하여 문학예술계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한 것으로 조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즉 조선의 정조를 표현한 것으로 조선의 민속적인 소재들을 사용하거나 목가적인 자연과 삶을 표현해내는 것이었다. 당시 평론가들은 조선예술의 방향을 향토색에서 찾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조선총독부 주최의 조선미술전람회(1922-44)에서 향토색을 심사기준의 하나로 강조하면서 조선향토색론이 확산되게 된 배경도 있다. 이인성의 <가을 어느날>(1934), <경주의 산곡에서>(1935), <해당화>(1944)는 향토적 소재를 사용하여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것들로 구성에 있어 인물과 풍경의 조화, 화면의 장식성이 서정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상징적인 화면을 만들고 잇다. 해석에 있어 많은 여지를 남기는 이런 작품들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이 점차 가속화되면서 색채의 강렬함은 사라지고 소재적인 측면이 부각되는 한계를 보이기도 한다.
IV. 인간, 자화상
이인성은 1945년 서울로 옮겨 미술교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이 당시에 주로 주변의 인물이나 정물들을 그렸다. 이 시기 작품에는 이전의 강렬한 색채와 특징들이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인간의 심리를 꿰뚫는 예리한 인물표현과 빠른 필치로 이인성의 진면목을 살펴보게 한다. 소품은 주로 목판 위에 제작되었는데 자화상에서는 삶을 바라보는 관조적인 태도가 드러난다. 눈을 감고 있거나 가식 없는 담담한 모습은 스스로를 성찰하는 모습이며 한편으론 시대적 고민과 개인적인 상처가 읽혀진다. 이번 전시에서는 사료평가를 거쳐 새로 발굴한 한국화 작품들이 출품되는데 이는 해방 후 우리미술의 방향을 찾는 과정에서 수묵화를 중시했던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이인성(1912-50) 약력
1912년 8월 28일 대구에서 출생
1922년 수창공립보통학교 입학
1928년 스케치를 나갔다가 0과회 회원들과 알게 됨
서동진이 경영하는 대구미술사에 들어가 수채화를 배우기 시작.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 <촌락의 풍경>으로 특선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 <그늘> 첫입선
1930년 대구지역 미술인들의 모임인 향토회 창립
제9회 조선미전에 <겨울 어느 날> <풍경 제1작> 입선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세모가경>으로 첫 특선.
일본 킹크레용 회사에 입사
1932년 다이헤이요 미술학교에 입학.
제13회 제국미술전람회에 <여름 어느 날>로 첫 입선
1935년 제14회 조선미전에 <경주의 산곡에서>로 최고상인 창덕궁상 수상
6월 대구 공회당에서 김옥순과 결혼
1935년 남산병원 3층에‘이인성양화연구소’개설
1937년 조선미전에 추천작가가 됨. 아루스다방 개업.
1938년 동아일보에서 개인전 개최
1942년 대구 공회당에서 제국미술전람회 입선 10주년 기념 개인전 개최
1945년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으로 이사. 이화여자중등학교 미술 교사로 부임
『자유신문』에 소설 삽화를 그리기 시작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부에 출강.
1948년 6월 자유신문사 후원으로 동화화랑에서 개인전 개최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서양화부 심사위원이 됨
1950년 11월 3일 경찰이 잘못 쏜 총에 맞아 다음 날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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