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유]/삶의 香氣

비잔티움 연대기

by 해오라비 이랑 2012. 11. 26.

 

1453년 5월 29일 그믐달이 뜬 화요일,

비잔티움 제국의 7,000여명 병사가 45일간 피흘리며 지키던 콘스탄티노풀 성벽이 함락되고

오스만 투르크의 10만 대군이 1100여년 지속된 동로마제국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한 날이다.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드라가세스는 황제 표식을 모두 떼어내고 칼을 들고 적진 속으로 들어가 싸우다 전사하였다.

전투가 끝나고 콘스탄티노풀의 거리는 온통 유혈이 낭자하였고 여자들은 강간 당하고 아이들은 꼬챙이에 찔려 죽었고 성당들은 잿더미가 되었다.

 

쓰러져가는 로마 제국을 되살리기 위해 AD 293년에 디아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을 동방과 서방으로 분리하였으나,

서쪽 로마는 죽고 동쪽 로마만 살아 남는다.

서방 로마는 AD 476년에 스키라족에 의해 로마가 함락되고 소년 황제 아우구스툴루스가 패위되고 멸망한다.

디아클레티아누스 황제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30년 5월 11일에 아예 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풀(이스탄불)로 옮긴다.

이때가 1123년간 지중해를 장악한 동로마 제국의 시발점이 되는 때이다.

88명의 황제가 1123년간 지배한 비잔티움 제국은 동방교회의 맹주로서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와의 대립을 하게 된다.

오늘날의 발칸반도가 다민족에 다종교화된 점도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알게 되면서 이해하게 되었다.

유스티아누스 황제(482-565)의 부인 테오도라는 거리의 창녀에서 황후가 되고, 일자무식의 말 구종 출신이 황제가 되기도 하며,

전쟁터에서 방패 위에 올려진 장군이 군인 황제로 태어나기도 하는 등 읽을 수록 많은 것을 알게 된다.

 

9세기에 이르러 비잔티움 제국은 위기를 극복하고 발칸반도와 소아시아 지역을 장악한다.

로마의 몸과 그리스의 정신, 동방의 영혼이 어우러져 서양의 모든 정치와 문화는 비잔티움을 중심으로 번영하게 된다.

동양에서는 장안(서안)과 유럽에서는 콘스탄티노풀이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고 세계의 중심이었다.

서유럽은 종교에 의한 암흑세계를 헤매고 있을 때 콘스탄티노풀은 문화와 예술 및 부를 누리는 르네상스를 맞는다.

 

비잔티움 제국이 없었다면 지금의 서유럽은 번영을 구가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비잔티움 제국이 동방에서 몰려오는 침략을 막아주는 방패 역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사라센, 몽골. 셀주크, 이슬람 세력 등의 침략을 혼자 힘으로 막으며 서방 세계를 보호하였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서유럽은 암흑세계를 털고 문예부흥을 맞으며 강한 나라로 변하게 된다.

 

11세기에서 시작된 십자군 원정은 비잔티움 제국을 몰락의 길로 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슬람이 점령하고 통치하는 예루살렘을 수복하고자 육로와 해상으로 출발한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풀을 경유하며 약탈과 방화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른다.

급기야 1198년 4차 십자군 원정에서는 십자군이 무방비 상태인 콘스탄티노풀 제국을 점령하고

대학살과 파괴를 자행하고 57년간 통치를 하며 제국을 도탄에 빠지게 만들었다.

여기에 제노아와 베네치아 공화국은 콘스탄티노풀에 조차지를 확보하고(지금의 갈라타 지역)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해상 무역권을 독차지한다.

현재 남아 있는 갈라타탑은 제노아 공화국이 세운 조차지의 성벽 중 하나로 지금도 보스포러스해 건너 소아시아에 남아 있다.

 

비잔티움 연대기는 외교관 출신인 J. J. Norwich라는 영국인이 펴낸 책을 번역한 책으로 2300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책이다.

이 책을 읽느라 눈이 많이 나빠졌지만 다시 한번 읽어 봐야겠다.

그동안 서유럽 중심 문화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책이다.

 

 

 

성소피아박물관

이곳에서 황제의 대관식이 열렸던 곳으로 비잔티움제국의 정신적인 지주 역활을 하였다.

비잔티움 최후의 날,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사제들 몇명이 성소의 남쪽벽으로 사라졌다.

전설에 따르면 그들은 콘스탄티노풀이 다시 그리스도교의 땅이 되는 날 벽에서 나와 중단한 미사를 재개할 것이라고 한다.

 

1453년에 콘스탄티노풀을 점령한 오스만 투르크의 황제 메메드2세는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였고,

지금도 그리스 정교회의 총대주교는 이스탄불에 있다.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AD 347-395).

이스탄불의 원형 경기장 오벨리스크 기단석에 있는 부조.

테오도시우스 1세는 북아프리카까지 제국을 확장하였으며 이때 이집트 룩소르에서 오벨리스크를 가져와 이곳에 세웠다.

 

 

 

 

 

 

 

 

 

동로마제국인 콘스탄티노플이 멸망하기 전까지는 아야소피아는 성당으로써 위용을 자랑하였다.

8세기에 2번의 성상 파괴 운동이 일어나 세워진 조각상은 모두 파괴되었다.

예수를 인간이기 때문에 성당 안에 그의 그림과 조각상을 모셔서는 안된다는 파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레네는 아테네 출신으로 동로마제국의 두번째 여황후가 된다.

남편이 780년에 열병으로 죽었을 때 외아들은 겨우 10살이었다.

이레네는 섭정을 시작하여 이후 11년동안 동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여황제가 되었다.

그녀는 열렬한 성상 옹호자였으며 784년에는 성상파괴자인 총대주교를 물러나게 하였다.

그녀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6세는 어머니의 반대파인 성상파괴자들과 손을 잡게 되고

그 일로 어머니인 이레네와 숙명적인 정치적 게임을 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6세가 어느 날 원형 경기장에서 나오다 기습을 받게 되는데

보스포러스를 건너 도망을 치다 붙잡혀 황궁으로 붙들려 온다.

그리고 그가 태어났던 포르피리 누각에서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6세는 어머니에 의해서 두 눈이 뽑히게 된다.

 

 

 

성소피아 대성당에 남아 있는 모자이크

오른편은 콘스탄티노플을 바치는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

왼쪽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에게 소피아 성당을 바치는 유스티아누스 1세 황제.

 

 

 

아야소피아 성당 북쪽 주랑에 모자이크된 알렉산데르 황제(912-913)

형 레오의 뒤를 이은 제위 기간은 불과 13개월이었다.

후사가 없던 형 레오가 죽자 그는 오랜동안 방탕한 생활을 하다 황제에 오른다.

그는 형을 무척 싫어 하여 형이 세운 모든 정책을 바꾸어 버렸다.

짧은 제위 기간에 그는 비잔티움 제국에 엄청난 피폐를 끼쳤다.

점심을 잔뜩 먹은 뒤 한낮의 열기 속에서 폴로 경기를 하다 발작을 하다 죽었다.

 

 

 

 

콘스탄티누스 9세인 모노마쿠스(1042-1055)와 조에 황후 사이에 앉은 예수

성소피아대성당의 남쪽 주랑 벽에 있다.

조에 황후는 방탕한 궁중 생활을 하였는데 비잔틴 시기 중 가장 사치와 허영이 심한 시기였다.

황제인 미카엘 5세가 1042년에 죽고 나서 자매인 조에와 테오도라가 같이 제국을 다스렸다.

조에가 64살이 되었을 때 남편으로 맞아들인 것이 모노마쿠스 황제였는데 이때가 조에 황후는 3번째 결혼이었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12세기에 모자이크된 성모 마리아.

옆에는 요한네스 콤네노스 2세 황제와 이레네 황후

이레네라는 이름의 황후가 아주 많다.

당시에 황후가 되면 이레네로 개명을 많이 하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황제도 콘스탄티누스라는 이름이 많다.

 

 

 

 

성모 마리아 옆에 문서를 받들고 있는 여자가 이레네 황후

옆에는 아들인 알렉시오스(나중에 그려 넣었다고 한다)


 

 

 

한때 비잔티움 제국의 땅이었던 아나톨리아의 어느 시골 마을,

핫튜사 가는 길에 차에서 내려 사진에 담아 보았다.

다시 한번 가 보고 싶은 곳이다.

 

 

 

 

3권으로 구성된 "비잔티움 연대기"

비잔틴은 형용사이고 비잔티움은 명사이다.

 

'[여유] > 삶의 香氣'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지막 4중주  (0) 2013.08.17
2012 VENICE in SEOUL  (0) 2012.12.21
그녀가 떠날 때 (When we leave)  (0) 2012.04.21
아틀라스 산맥에서 펼쳐지는 영화 "신과 인간"  (0) 2012.02.17
영화 "르 아브르(Le Havre)  (0) 2011.12.23